수나라, 고구려와 동북아시아 패권경쟁에서 침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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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고구려와 동북아시아 패권경쟁에서 침몰하다
  • 정거배
  • 승인 2016.06.09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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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제대로 알자<64>
▲ 수나라 때는 고구려와 무려 4차례 전쟁을 하면서 국력을 소진했고 백성들을 동원해 운하를 건설했다.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항저우에서 베이징에 이르는 경항대운하는 수나라 때 건설된 토목사업이었다.

▲ 정 거 배 <인터넷전남뉴스 기자/중국언어와 문화학 전공>
먼저 수나라의 멸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의 중국 동북 3성(랴오닝·지린·헤이룽쟝성)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우리가 만주라고 부르는 이 일대는 척박하고 춥고 버려진 광야처럼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잘못된 선입관은 우리가 역사인식 면에서 큰 오류와 오해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만주는 부여에서부터 주몽이 세운 고구려에 이어 발해라는 나라가 있었던 우리 민족의 역사 터전이다. 그 이후 12세기 북송을 멸망시킨 금나라의 선조가 신라인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서 신라가 고려에 멸망하면서 북방으로 이주한 신라인들이 금나라를 건국한 주도세력이었다는 사실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금나라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를 제압하고 한족의 북송 왕조를 멸망시켰다. 북송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한족의 송 왕조는 황제마저 금나라의 인질로 잡힌 채 패했다. 또 수도였던 당시 황하 북쪽의 카이펑(開封)에서 장강 이남의 지금의 항저우(抗州)까지 옮겨야만 했다. 항저우 시대를 중국 역사에서는 카이펑시대의 북송시대와 구별하기 위해 남송시대라고 부른다.  12세기 금나라는 지금의 만주일대와 중국 대륙의 중원을 장악하는 등 동북아시아의 패권국가였다. 

12세기 동북아시아 패권자는 금나라
그 뒤 13세기 초 금나라는 북방 초원에서 강성해 진 징기스칸의 후손인 몽고의 원나라에 의해 멸망한다. 14세기 중반 원나라는 한족을 지배한 지 100년도 못돼 중원에서 북방 초원지대로 쫓겨난다. 1368년 주원장이 한족의 명나라를 건국한다. 명나라는 17세기 중반인 1644년 후금(청)에 의해 멸망 당한다. 청나라는 1911년 쑨원이 주도한 신해혁명으로 무너질 때까지 260년 넘게 중국대륙을 지배했다. 만주족이라고 부르는 여진족은 사실 고구려와 발해의 후손에다 신라후손까지 합쳐진 우리민족이라는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중국정부가 내세우는 동북공정은 그간 한족 중심의 역사적 관점에서 지금의 56개 소수민족이 수 천년 동안 부대끼면서 이어져 온 중화민족이라는 의미로 확대한 것이다. 그래서 과거 전쟁의 역사를 주류민족인 한족이 이민족과의 전쟁과 지배가 아닌 중화민족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투쟁의 성격으로 보고 있다. 어찌됐던, 역사적으로 만주를 지배하는 나라는 동북아시아 패권국가였다. 7세기 초반 당나라 태종이 왜 만주에서 강성해지는 고구려를 보다 못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섰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특히 당나라 직전 왕조 수나라가 고구려와 전쟁 때문에 멸망한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던 당태종이었다.  
 
중국 왕조 가운데 수명이 짧았던 왕조 중 하나가 수나라다. 수나라는 앞서 400년을 이어 온 한나라 왕조의 지속에 비하면 너무 짧았다. 3명의 황제에 40년 동안만 존속하다가 멸망했다. 수나라가 이처럼 단명하게 된 가장 큰 원인 중의 하나는 동북아시아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벌인 전쟁으로 국력을 낭비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하다.

중국 대륙에서는 서기 3세기 초반 한나라가 역사 무대 위에서 사라지고 소설로도 유명한 삼국시대에 이어 5호 16국 시대 등을 거치게 된다. 서기 589년 수나라 문제(文帝,양견)가 남조의 진(陳)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혼란스럽게 369년 간 계속된 위진남북조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수나라의 천하통일은 중국 역사적으로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먼저 과거제도가 탄생했다. 위진남북조시대까지 관리는 출신 가문을 보고 등용했다. 그래서 평민이나 가난한 집안 출신들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중앙권력층에 진입할 수 없었고 보잘 것 없는 하위직 관리에 머물러야 했다.

중국 역사상 첫 과거제도 실시
그러나 수 왕조는 시험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는 과거제도를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도입했다. 수나라 문제는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중소 지주계급의 정치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출신 가문으로 관리를 등용하는 구품중정제를 폐지했다. 또 관리 등용의 권한을 중앙 정부가 행사했다. 수나라 2대 황제 양제(煬帝, 양광, 604~618)는 즉위하자마자 진사과를 설치해 중앙에서 시험을 주관해 인재를 등용했다. 진사과에 합격하면 출신 집안과 무관하게 중앙 또는 지방관리가 될 수 있었다. 평민출신 자제들도 고위직에 진출할 수 있는 중국 역사상 관리 등용제도의 혁명이었다. 수나라 때 시작한 과거제도는 당 왕조와 송을 거쳐 청나라 때까지 1300년 동안 유지됐다. 또한 조선까지 전파돼 인재 등용의 제도로 자리 잡았다.

수나라 때는 또 지금의 저장성 항저우와 베이징을 연결하는 경항대운하가 건설됐다. 거대한 수리 공사였던 경항대운하는 수양제 때인 서기 605년 착공해 610년 준공됐는데, 베이징에서 항저우까지 1794km를 연결한 인공운하다. 베이징에서 시작해 텐진, 허베이, 산둥, 장쑤,저장 등 성과 시를 경유한다. 경항운하는 중국의 남북을 이어주는 교통의 대동맥이었지만 민중들의 피와 땀의 산물이었다. 수나라 멸망의 원인 중 하나가 대규모 토목공사에 따른 백성들의 고단한 삶과 민심이반이었다. 수양제는 운하를 통해 지방순시를 자주했다. 무려 20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지방순시를 하기도 했다. 그 때 양제는 4층으로 지어진 궁전과 같은 배를 건조해 순시 때 타고 다녔다. 화려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후궁들과 왕족, 문무대관과 호위병까지 수천 척의 배가 동원돼 행렬만 2백리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운하의 양쪽 육지에는 갓길을 만들어 8만 명에 달하는 백성들이 배와 연결해 놓은 밧줄을 앞으로 끌도록 했다. 양제 선단이 지나는 운하 근처 지방 관리들은 백성들로부터 연회상을 준비하도록 했다. 권력의 호화스런 생활과 대비해 백성에 대한 수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수 양제, 고구려 원정의 실패
수나라와 고구려는 지금의 지린,랴오닝, 헤이룽장성 등 동북 3성 일대에서 동북아시아 패권을 둘러싸고 수 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무려 4차례 전쟁을 치렀다. 서기 598년 동북의 패권자 고구려는 영양왕 때 지금의 허베이성과 인접한 요서지방을 선제 공격하자 수나라 문제는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와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고구려 영토 깊숙이 들어가 고립됨으로써 성과도 없이 퇴각했다. 이때 수나라는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으로 고구려와 전쟁을 했지만 육군은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가 떨어져 철수했고 수군도 태풍을  만나 철군했다.

이어 수양제 때인 612년, 613년, 614년에 고구려와 수나라는 격전을 치렀다. 서기 611년 수양제는 고구려와 전쟁을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612년 봄 수나라의 113만 대군은 지금의 베이징 외곽에 집결시키고 요동을 거처 고구려 국경선쪽으로 진군한다. 이 전쟁은 수양제가 직접 지휘했다. 산둥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 외곽까지 진출했던 수나라 군대는 매복해 있던 고구려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했다. 또 30만 명은 육로를 이용해 압록강을 건너오자 고구려 군대는 패한 척 후퇴하다가 포위해 섬멸 당했다. 이때 수나라 군대는 2700명만 겨우 요동으로 도망쳐 왔다고 한다.
 
과거에 한국 교과서에도 실린 살수대첩이 있었는데, 강물을 막아 수나라 군대를 수장시켰다는 내용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을지문덕 장군의 수공작전에 따른 전과가 아니라는 것이다. 고구려군의 전술과 을지문덕의 뛰어난 전략이 있었고 수나라군 내부의 전술적 오류가 대패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다음해인 613년 봄 수나라는 다시 고구려를 치기 위해 출병했지만 후방에서 반란이 일어나 중도에 철군할 수 밖에 없었다. 이어 614년 봄 수양제가 다시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와 전쟁에 나섰다. 수군까지 동원한 총력전이었고 고구려 수도 평양성까지 진출했지만, 후방에서는 농민반란이 일어나 회군하게 된다.
고구려와 동북지방을 놓고 4년 동안 전쟁을 치른 수나라는 인적, 물적 자원을 막대하게 소모하면서 국력이 쇠락하는 직접적인 원인 됐다.

전국적인 농민반란 왕조 멸망 앞당겨
집권세력의 호화생활과 전쟁으로 인해 가혹한 세금 징수와 부역 징발로 백성들의 생활은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고구려와 전쟁을 시작할 시기에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수양제가 첫 번째 고구려와 전쟁에 나선 612년 산둥성에서 왕박이란 사람이 반란을 일으켜 수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그가 반란을 주도하면서 백성들에게 주장한 것은 ‘고구려와 전쟁을 구실로 병사로 끌려가 억울하게 죽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러자 백성들이 크게 동요했고 그를 지지했다.

613년에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 출병하자 농민반란을 전국 각지로 확산됐다. 지금의 허난성에서 군량미를 운반하던 귀족출신의 양현감이라는 인물이 군사반란을 일으킨다. 양현감 역시 ‘위기에 처한 세상과 백성을 구원한다’며 반란을 주도하자 동조하는 백성들이 하루에도 수천 명씩 합세했다고 한다.
결국 수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됐지만, 전국으로 번진 농민반란은 지속됐다. 처음 산둥에서 시작된 농민반란은 전국 각지로 확산되고 수많은 귀족들과 관리들까지 수왕조에 반기를 들었다.

서기 617년 타이위엔(太原)에 주둔 중이던 이연(566~635)이 그의 아들 이세민(나중에 당 태종)의 용의주도한 작전에 따라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은 수도 장안(시안)까지 진격해 황궁을 접수한다. 이어 반란군의 지휘자 이연은 수양제의 14살 된 손자를 황제로 옹립한다. 그러면서 양제를 태상황으로 밀어냈다. 이연 자신은 승상자리를 차지해 권력을 거머쥔다. 618년 태상황 양제는 부하에게 살해된다. 그러자 이연은 황제로 옹립한 양제의 손자인 공제를 폐위시키고 황제자리에 오른다. 수왕조가 40년 만에 막을 내리고 국호를 당으로 바꾸게 된다.

당나라는 1대 황제는 이연(고조)에 2대 황제 이세민(태종) 때 동북아시아의 패권자 고구려를 치기 위해 출병한다. 수나라의 멸망이 고구려와 전쟁 때문이었던 것을 잘 알고 있던 당 태종이 전쟁에 나선 이유는 명확하다. 그는 30년 전 수나라가 고구려 출정을 감행하면서 국력을 소진했고 이로 인한 농민 반란으로 자신과 아버지가 당나라 왕조를 세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출병 이유는 고구려가 동북지역에서 세력이 강성해 졌기 때문에 이를 두고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기 645년 3월 당태종은 출병하면서 수도 장안에 남아 대신 국정을 챙겨야 하는 아들에게 자신이 입고 있는 도포를 가리키며 “다음에 너를 볼 때 이 옷을 갈아입을 것이다”고 말했다. 옷을 갈아입어야 할 그해 겨울이 오기 전에 고구려와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겠다는 결심이었다. 당태종의 군대는 그해 5월 고구려 땅인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그러나 안시성 전투는 상황이 달라졌다. 유명한 양만춘 장군이 등장하는 전투다. 그러나 장기전을 유도하던 고구려의 치밀한 작전에 당태종의 군대는 우왕좌왕했다. 보급로가 길어지고 식량은 떨어졌다. 그해 9월 당태종의 군대를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11월이 돼서야 지금의 허베이 유주에 도착하자 병력은 처음 출병할 때에 비해 5분의 1로 줄어 있었다.

그 이후 이세민의 아들 당나라 고종은 신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멸망시킨다. 서기 668년이었다. 동북아시아 패권자 고구려의 멸망으로 중국 대륙의 동북지방은 당나라의 영토가 됐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705년간 동북아시아에 존속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러나 역사학자이자 독립 운동가였던 단재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가 기원전 2세기 이전부터 성립했기 때문에 900년 이상 존속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신채호 선생은 한나라와 무제와 전쟁을 했던 세력도 고조선이 아니라 고구려라고 주장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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