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35] 양명학의 전래와 배척
상태바
[도하 김형만의 한국유학이야기-35] 양명학의 전래와 배척
  • 목포시민신문
  • 승인 2021.11.19 15: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실천 중시한 양명학 주자학 중심 조선사회에 자리 못 잡아
지행합일 등 학문적 결합 보다 기득권 학자 간의 사상구속과 배척 기인
퇴계 등 유학사상계 고루하고 편협함…학문사상 연구와 발전 저해 지적

[목포시민신문] 중국 사상사에서 송대 성리학은 근세적인 전환으로서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주자(朱子)가 성리학의 체계를 거의 정비해갈 때 이미 육상산(陸象山)에 의해 心卽理說(심즉리설)’이 제창되어 정주학(程朱學)性卽理說(성즉리설)’과 대립하게 되었다. 정주의 성리학은 송대에서 명대에 이르는 동안 정통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고, 육상산의 학풍은 명대의 진백사(陳白沙)를 거쳐 왕양명(王陽明)에 이르게 되었다.

영명(陽明)은 명대 후반에 출현한 왕수인(1472~1528)의 호()이다. 그는 상산(象山)의 심학(心學)을 계승,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여 주자학과 대립하는 학풍으로 양명학(陽明學)을 성립시켰다. 그 내용은 심즉리(心卽理)’를 바탕으로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知行合一)’을 주장하여, 주자학의 번쇄(煩瑣)함을 비판한 것이다. 양명학은 곧 명대의 학술을 대표할 정도로 성행하여 왕양명은 육상산과 더불어 문묘(文廟)에 종사되었다. 그리하여 양명학은 주자학과 더불어 중국 근세 유학의 두 갈래 큰 흐름의 하나가 되었고, 근대 학술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중국에 있어서는 송학의 여폐(餘弊)가 번쇄에 빠지고 공론(空論)으로 흘렀기 때문에, 양명의 양지론(良知論)과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같은 단도직입(單刀直入), 간이(簡易)한 학설은 크게 호평을 얻어 사방에서 환영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조에서의 양명학은 주자학 일변도인 학문 풍토의 제약을 받아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고 몇몇 학자들의 손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 갔다.

양명학의 전래시기에 대해서는 뚜렷한 정설이 없으나 대체로 조선조 명종 때인 것으로 보인다. 일찍이 주자학의 체계에는 송대에 주자와 육상산이 벌인 논쟁을 통하여 심학(心學)에 대한 비판적 입장이 확립되어 있었으며, 또한 이를 익히 알고 있던 조선의 주자학파는 양명학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퇴계(退溪)는 양명학이 전래하기 시작한 초기에 이미 이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을 가하여, 전습록논변을 지어 양명학을 배척하였고, 또 따로 백사시교전습록초전인서기후라는 글을 통해서, 양명의 입설(立說)한 유래와 언론을 소개한 후에 그 폐해와 해독을 말하여, 인의(仁義)를 해치고 천하를 어지럽힐 자는 반드시 양명이라 하고, 이러한 사람으로 득군이행기지(得君而行其志)하면 사문사세(斯文斯世)의 화()는 진()보다 더한 것이 있으리라 하여 통봉(痛鋒)을 가하였다. 이후 퇴계의 문인을 비롯한 당시의 학자로서 양명의 학설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배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후 주자학파가 당시 국내 양명학파 인물들을 비판할 때에도 그 이론적 기반은 퇴계를 넘어서는 것이 없었다. 조선 시대에 양명학이 전래되고 또 이해되는 과정에 있어서도, 처음부터 이처럼 주자학의 정통적 입장에 의한 비판과 배척이라는 제약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양명학에 깊은 이해와 호의를 가진 인물이 사상계의 한 모퉁이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다. 서화담(徐花潭)의 문인이며, 퇴계와 친밀한 교유를 가졌던 남언경은 그의 문인인 이요와 더불어 양명학에 관한 상당한 이해를 일찍부터 가졌다. 이들 남언경과 이요를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로 보는 것은 단순한 이해의 정도를 넘어서 양명학에 관한 진지한 신념을 가졌던 사실이다. 특히 이요는 선조와의 청대(請對)에서 왕양명의 학설을 설득력 있게 소개하였고, 선조도 이에 상당한 호의를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는 이요를 만난 후 류성룡과 토론하면서 류성룡이 양명학을 비판하자 반대의 뜻을 보이면서, 끝내는 이 학문을 하는 것은 학문을 전혀 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하며 양명학을 두둔하는 태도를 보인 적이 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청나라와 강화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정치가였다. 그는 척화의리론(斥和義理論)을 주장하는 주자학자들 틈바구니에서 이념적 대의에 앞서 현실 타개를 위한 정책을 추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 입장은 그가 의리를 고정된 명분 속에서 찾는 것보다 상황과 주체가 합치하는 곳에서 찾는 자각적인 태도를 가졌던 데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최명길 부자의 양명학풍은 그의 가학(家學)을 이루었으나, 손자인 최석정은 당시의 비판을 의식하여 양명학에 대한 공식적인 반박 태도를 보임으로써 이 학통도 계승되지는 못하였다.

필자의 '정관(靜觀' ㅡ 萬物靜觀皆自得) ㅡ 모든 일과 사물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요히 생각해보면 모두 그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

최명길과 동시대 인물인 장유도 독자적인 연구로 양명학에 심취하여 양명의 시문을 자주 인용하였다. 또한, 양명학이 선학(禪學)의 성격을 띠었다는 비판에 대하여, ‘양명의 양지(良知)에 관한 가르침은 노력하는 실지가 오로지 성찰하고 확충하는 데 있으며, 언제나 고요함을 좋아하고 움직임을 싫어하는 것을 배우는 자가 경계해야 할 것으로 삼았다하여, 고요함을 주장하는 선학과는 다르다는 것을 강력히 변호하고 있다. 장유는 나아가 당시의 학풍이 주자학 일변도에 기울어져 학문의 다양성과 자유는 물론, 학자들의 기개 또한 없음을 비판하는 발언도 꺼리지 않았으니, 곧 사상이 편협하고 구속이 심하여 까닭도 모르고 남들이 정주학을 존중한다고 하여 형식적으로 나도 따라가는 것이니, 학문에 실심(實心) 실득(實得)이 없고, 다만 부진(不振)이 있을 따름이라 하였던 것이다.

최명길과 장유도 학파를 확립하지 못하고 그쳤으나, 그 뒤로 하곡 정제두에 이르러 조선의 양명학은 학문의 체계와 학파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정제두는 소론에 속하는 학자로 일생동안 양명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비록 공개적으로 문호를 열어 학파를 형성하지는 못하였으나, 그의 학풍을 흠모하여 문하에 들어오거나 이 학풍을 계승하는 인물들이 출현하여 실질적으로 조선 후기의 양명학파인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를 형성하였다.

이광신, 이광사, 이광려, 이태형, 김택수, 심육 등이 정제두의 문하에서 나왔고, 이광사의 아들 이영익과 그 종질 이충익, 이광려의 문인 정동유 및 정제두의 외손 신작, 이충익의 현손 이건창에게로 학풍이 전승되었다. 근세에 정만조, 박은식이나 이건방도 양명학을 닦았고, 이건방은 정만조의 당질 정인보에게 학풍을 전하였으며, 이와 동시대에 송진우도 양명학의 발전을 위해 힘썼던 것이니, 이처럼 그 학통을 면면하게 이어 왔다.

당시의 사회에서는 양명학이 이단으로 규정되고 배척되었던 주자학의 시대였으므로, 이들 양명학파는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양명학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표면적으로는 양명학을 비판하는 주장도 하였으며, 자신이나 자신의 조상이 양명학을 좋아하였던 사실조차 감추거나 변명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 양명학파는 대체로 정제두 이후에 소론의 가계(家系)를 중심으로 하여 가학(家學)으로 계승되었고, 공식적으로는 주자학을 자처함으로써 겉으로는 주자학파이나 속으로는 양명학파(陽朱陰王)’로서 존속해 왔던 것이다.

조선의 양명학파는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사회적 공인을 받지 못함으로써 극소수의 학문적 신념을 가진 인물들에 의해 가학(家學)으로 전하는데 그쳤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조 유학사에 있어서 양명학파가 누렸던 세력이 작았다 하여 그 영향력을 가볍게 볼 수는 없다. 조선 후기의 사상사에서 양명학은 독자적인 활동 영역을 확보하지 못하였음은 사실이나, 주자학파의 비판을 통하여 이에 대응하는 유학 사상의 한 흐름을 지켰던 데에 커다란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주자학으로 완전히 지배된 사회에서 벽이단론(闢異端論)의 비판을 무릅쓰고 양명학을 탐구하였던 것은 주자학파가 정통 사상의 순수성을 추구하는 의지와 마찬가지로, 양명학파 또한 학문에 대한 자율성을 추구하는 의지를 발휘하였던 것이다. 정통 사상의 권위로부터 이탈하려는 자율성 내지 학문적 자유의 분위기는 조선 근세 사상의 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는 실학파(實學派)와 서학파(西學派)에게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양명학이 조선에서 떨치지 못한 것은 그 학설 자체에 결함이 있거나 가치가 작다는 것보다도 학자 간의 사상구속과 배척에 기인한 것으로, 퇴계를 비롯하여 당시 유학사상계의 완고하고 고루하고 편협함이 학문 사상의 연구와 발전에 크나큰 해독을 끼친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정인보도 양명학연론에서 일편자리심(一片自利心)이 결국 학문을 빌어 온갖 사계(私計)를 이에서 해결하고 말았다고 지적하였듯이, 양명학의 배척은 학술적(또는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주자학파 집권세력의 탄압과 횡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다음 호에는 한국유학 이야기 36번째로, '호락논쟁이' 연재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